네이메헌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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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이메헌 조약은 1672년부터 1678년까지 이어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하기 위해 체결된 일련의 조약들을 통칭한다. 이 조약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스칸 전쟁 등 다른 전쟁들의 근원이 되었으며,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스웨덴 등 여러 국가들이 참여했다. 조약의 결과로 프랑스는 프랑슈-콩테와 플랑드르 일부 지역을 획득했으며, 콜베르의 고관세 정책이 폐지되었다. 또한,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는 이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테 데움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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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메헌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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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명칭 | 나이메헌 평화 조약 |
원어 명칭 | 프랑스어: Traités de Paix de Nimègue 독일어: Friede von Nimwegen 네덜란드어: Vrede van Nijmegen |
관련 전쟁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
결과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종결; 프랑스가 프랑슈콩테, 일부 플랑드르 도시, 에노를 통제 |
서명일 | 1678년–79년 |
서명 장소 | 네덜란드 공화국, 나이메헌 |
중재자 | 알 수 없음 (문서에 미기재) |
서명국 |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합스부르크 스페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스웨덴 제국 덴마크-노르웨이 뮌스터 주교후국 뤼네부르크 공국 (첼레) 신성 로마 제국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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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672년-167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은 네이메헌 조약으로 공식 종결된 여러 전쟁들의 근원이었다.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스칸 전쟁 등은 별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모두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잉글랜드 왕국은 초기에 프랑스 편에서 참전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1674년에 철수했다. 쾰른 선제후국도 1674년에 전쟁에서 이탈했고, 뮌스터 주교령은 프랑스에서 반프랑스 연합으로 돌아섰다. 덴마크-노르웨이는 1675년에 반프랑스 진영에 합류하여 주로 스웨덴과 싸웠다.
2. 1.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년-167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은 네이메헌 조약으로 공식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스칸 전쟁 등 다른 전쟁들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쟁들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일부로 간주된다. 잉글랜드 왕국은 초기에 프랑스 측으로 참전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조약 이후 1674년에 전쟁에서 이탈했다. 쾰른 선제후국은 1674년에 전쟁에서 이탈했고, 뮌스터 주교령은 프랑스 진영에서 반(反)프랑스 연합으로 돌아섰다. 덴마크-노르웨이 역시 1675년에 반프랑스 진영에 합류하여 주로 스웨덴에 대항하여 싸웠다.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스칸 전쟁이 끝났을 때 교전국은 다음과 같았다.
반(反)프랑스 연합 | 프랑스와 동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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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 얻지 못했던 프랑슈-콩테 (부르고뉴 백작령)를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빼앗았고, 플랑드르의 몇몇 도시를 획득했다. 그러나 재무 장관 콜베르가 네덜란드 경제를 압박하기 위해 시행했던 고관세 정책은 포기하고 1664년 수준으로 되돌렸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도 네덜란드와 강화했다. 네덜란드는 스웨덴과의 관세 관련 무역 협정 체결을 원했지만, 스웨덴은 이를 거부하고 평화 조약만 체결했다. 이는 프랑스-스웨덴 동맹 조약 내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네덜란드의 요구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와도 강화했다. 조약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을 기초로 했지만, 로렌 공국에 관해서는 프랑스가 점령한 1670년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황제와 스웨덴 간의 강화는 프랑스와의 강화 조약에 포함되어, 원상 복귀가 인정되었다.
2. 2. 관련 전쟁
1672년-167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은 네이메헌 조약으로 공식 종결되었으며, 이 전쟁은 다른 여러 전쟁의 근원이었다.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과 스칸 전쟁과 같은 갈등은 별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모두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여 그 일부를 구성한다.[1] 잉글랜드 왕국은 처음에는 프랑스 측에서 전쟁에 참여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조약 이후 1674년에 철수했다.[1] 쾰른 선제후국은 1674년에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뮌스터 주교령은 프랑스에서 반(反)프랑스 연합으로 입장을 바꾸었다.[1] 덴마크-노르웨이 또한 1675년에 반(反)프랑스 측에 합류하여 주로 스웨덴에 대항하여 싸웠다.[1]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스칸 전쟁이 끝났을 때 교전국은 다음과 같았다.[1]
반(反)프랑스 연합 | 프랑스와 동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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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교전국
1672년-167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스칸 전쟁이 끝났을 때 교전국은 다음과 같았다.반(反)프랑스 연합 | 프랑스와 동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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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협상은 1676년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1678년 이전에 합의되거나 서명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조약이 네이메헌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모든 문서의 총칭을 '네이메헌 조약'이라고 한다. 관련된 일부 국가들은 첼레 조약, 생제르맹 조약, 퐁텐블로 조약과 같이 다른 곳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3. 조약 내용
3. 1. 주요 조약
네이메헌 조약 및 관련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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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신력 / (구력)) | 조약 | 반 프랑스 측 | 프랑스 측 | 텍스트 | 참고 |
1678년 8월 10일 | 네이메헌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프랑스 | [https://www.geschiedenislokaal024.nl/bronnen/de-vrede-van-nijmegen/ 네덜란드어] | [2][3] |
1678년 8월 10일 | (별도의 통상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프랑스 | [4] | |
1678년 9월 17일 | 네이메헌 조약 | 스페인 | 프랑스 | 프랑스어 | [2] |
1679년 2월 5일 | 네이메헌 조약 | 신성 로마 제국 | 프랑스 및 스웨덴 | 라틴어/스웨덴어, 독일어 | [2] |
1679년 2월 5일 (1679년 1월 26일) | 첼레 조약 | 뤼네부르크(첼레) | 스웨덴 (및 프랑스) | [5] | |
1679년 3월 19일 | 네이메헌 조약 | 뮌스터 | 스웨덴 | [6][7] | |
1679년 6월 29일 (1679년 6월 19일) | 생제르맹 조약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 프랑스 (및 스웨덴) | [2] | |
1679년 9월 2일 (1679년 8월 23일) | 퐁텐블로 조약 | 덴마크-노르웨이 | 스웨덴 (및 프랑스) | [2] | |
1679년 9월 26일 (1679년 9월 16일) | 룬드 평화 조약 | 덴마크-노르웨이 | 스웨덴 (및 프랑스) | [2] | |
1679년 10월 12일 (1679년 10월 2일) | 네이메헌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스웨덴 | [2] |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 얻지 못한 프랑슈콩테(부르고뉴 백작령)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서 빼앗았다. 또한 플랑드르의 몇몇 도시를 획득했다. 그러나 재무 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네덜란드 경제를 압박하기 위해 시행했던 고관세 정책을 포기하고 1664년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도 확인되었다.
프랑스와 동맹국인 스웨덴도 네덜란드와 강화했다. 이 조약 협상에서 네덜란드는 스웨덴에 대한 관세 관련 무역 협정 체결을 포함했지만, 스웨덴 측은 거부하고 평화 조약만 체결했다. 이는 프랑스가 프랑스-스웨덴 동맹 조약 내용을 위반하고 네덜란드의 요구를 지지한 것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무역 협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신성 로마 황제(오스트리아)와도 강화했다. 조약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을 기초로 이루어졌지만, 로렌 공국에 관해서는 프랑스가 점령한 1670년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황제와 스웨덴 간의 강화는 프랑스와의 강화 조약에 포함되어 원상 복귀가 인정되었다.
3. 2. 영토 변화
네이메헌 조약으로 프랑코-네덜란드 전쟁은 종결되었고, 프랑스는 프랑슈콩테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8] 또한 프랑스는 1659년 피레네 조약과 1668년 아헨 조약에 따라 병합했던 지역 외에도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영토를 추가로 획득했다. 여기에는 아르투아 백작령의 나머지 북서부 지역, 생토메르, 카셀, 에르, 이프르, 캉브레 주교령, 남부 에노 백작령의 발랑시엔과 모뵈주 등이 포함되었다.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점령했던 마스트리흐트와 오렌지 공국을 네덜란드 총독이자 윌리엄 3세에게 양도했다. 프랑스군은 북부 플랑드르와 에노의 여러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점령했던 필립스부르크 요새를 유지했지만, 프라이부르크(1697년까지)와 켈(1698년까지)의 프랑스 점령은 받아들여야 했다. 이 도시들은 라인강 우안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 얻지 못한 프랑슈콩테(부르고뉴 백작령)를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빼앗았고, 플랑드르의 몇몇 도시를 획득했다.
3. 3. 경제적 변화
프랑스는 네덜란드 계승 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프랑슈콩테(부르고뉴 백작령)와 플랑드르의 몇몇 도시를 얻었다. 그러나 재무 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네덜란드 경제를 압박하기 위해 시행했던 고관세 정책은 포기하고 1664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1]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도 네덜란드와 강화 조약을 맺었다. 네덜란드는 스웨덴과의 관세 관련 무역 협정 체결을 원했지만, 스웨덴은 이를 거부하고 평화 조약만 체결했다. 이는 프랑스가 프랑스-스웨덴 동맹 조약 내용을 어기고 네덜란드의 요구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1]
4. 조약의 영향 및 평가
네이메헌 조약은 17세기 후반 유럽의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종결되었고,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프랑슈콩테와 스페인령 네덜란트의 여러 도시를 획득하며 유럽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전쟁 이전의 영토를 회복했고, 스페인은 일부 영토를 상실했다.
4. 1. 프랑스-스웨덴 동맹의 약화
프랑스와 동맹국인 스웨덴도 네덜란드와 강화했다. 이 조약 협상에서 네덜란드는 스웨덴에 대한 관세에 관한 무역 협정 체결을 포함했지만, 스웨덴 측은 거부하고 평화 조약만 체결했다. 이는 프랑스가 프랑스-스웨덴 동맹 조약 내용을 위반하고 네덜란드의 요구를 지지한 것이 배경에 있었고, 무역 협정은 성립되지 않았다.[1]4. 2. 문화적 영향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는 이 행사를 위해 테 데움을 작곡했다. 테 데움의 전주곡은 유로비전 주제가로도 알려져 있다.참조
[1]
서적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
https://books.google[...]
ABC-CLIO
2008
[2]
서적
International Law in Historical Perspective, Volume 6
https://books.google[...]
A. W. Sijthoff
1973
[3]
문서
[4]
문서
[5]
서적
The History of Modern Europe from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to the War in the Crimea, in 1857
https://archive.org/[...]
John Murray
1864
[6]
웹사이트
History
https://treatiesofni[...]
Treaties of Nijmegen Medal
2010
[7]
문서
[8]
서적
La Belle France
https://books.google[...]
Vintage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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